📝 이 글을 쓰게 된 계기
며칠 전, 퇴근길 지하철에서 문득 창밖을 봤습니다. 어느새 해가 짧아져 있더라고요. 분명 얼마 전까지 퇴근할 때도 환했는데. 그 순간 갑자기 가을이 왔구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떠오른 곳이 있었습니다.
사실 저도 처음엔 몰랐습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찾게 되는 장소가 있다는 걸요. 근데 막상 돌이켜보니까, 봄이 오면 그곳, 여름 끝자락엔 저곳, 가을엔 또 다른 어딘가. 마치 철새처럼 정해진 루트가 있더라고요.
38년 살면서, 특히 직장생활 10년 넘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습관인 것 같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계절마다 찾아가는 위로 장소들. 그리고 왜 하필 그곳이어야 했는지에 대해서요.
🌸 봄 — 퇴근 후 들르는 동네 작은 공원
제가 봄마다 찾는 곳은 거창한 벚꽃 명소가 아닙니다. 집에서 도보로 7분 거리에 있는, 이름도 잘 모르는 작은 공원입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어린이공원’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여기를 처음 발견한 건 5년 전쯤이었습니다.
당시에 프로젝트가 겹쳐서 정말 미친 듯이 바빴거든요. 3월 내내 야근. 4월에도 야근. 그러다 어느 날 퇴근하는데, 갑자기 집에 가기 싫은 거예요. 그냥 아무 데나 앉아있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걷다가 발견한 곳이 그 공원이었습니다.
벤치에 앉았는데, 가로등 불빛 아래로 벚꽃잎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관광지 벚꽃처럼 화려하진 않았습니다. 근데 그게 오히려 좋았습니다. 아무도 사진 찍는 사람 없고, 그냥 조용히 꽃잎만 떨어지고.
그 뒤로 매년 봄이면 그 벤치에 앉습니다. 편의점에서 캔맥주 하나 사서요. 거창한 건 아닌데, 이상하게 그 시간만큼은 일년 중 가장 평화롭게 느껴집니다.
🌊 여름 끝자락 — 을왕리 해변의 평일 저녁
여름엔 바다를 찾게 됩니다. 그것도 여름이 한창일 때가 아니라, 8월 말에서 9월 초 사이. 사람들이 슬슬 빠지기 시작할 때요.
을왕리 해변을 처음 간 건 우연이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2019년이었을 거예요. 친구가 갑자기 “바다 보러 가자”고 해서 퇴근하고 무작정 차 타고 갔습니다. 금요일 밤이었는데, 도착하니까 10시가 넘었더라고요.
근데 그때 본 바다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한여름의 북적거림은 사라지고, 파도 소리만 들리는 해변. 모래사장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편의점 삼각김밥 먹으면서 멍하니 있었습니다. 친구랑 대화도 별로 안 했습니다. 그냥 같이 바다 보고 있었을 뿐인데, 그게 위로가 됐습니다.
그 뒤로 매년 여름 끝자락엔 을왕리를 갑니다. 혼자 갈 때도 있고, 가끔 후배랑 같이 가기도 하고요. 중요한 건 한여름이 아니라 여름이 끝나갈 때라는 점입니다. 그 시기의 바다는 뭔가 다릅니다. 설명하기 어려운데, 쓸쓸하면서도 정리되는 느낌이랄까요.
🍂 가을 — 경의선 숲길 연남동 구간
가을엔 무조건 경의선 숲길입니다. 그중에서도 연남동 구간을 가장 좋아합니다.
사실 저도 처음엔 “거기 너무 사람 많지 않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인스타그램에서 보던 그 핫플레이스잖아요. 근데 막상 가보니까 시간대만 잘 고르면 의외로 한적합니다. 저는 주로 평일 오전에 반차 내고 갑니다. 아침 10시쯤 도착하면 산책하는 어르신들, 강아지 데리고 나온 분들 정도만 계시거든요.
가을에 이 길이 좋은 이유가 있습니다.
양옆으로 심어진 나무들이 노랗고 빨갛게 물드는데, 그 사이로 걷는 느낌이 정말 좋습니다. 그리고 중간중간 있는 작은 카페에서 따뜻한 음료 하나 사서 천천히 걸으면, 한 시간이 금방 갑니다. 이상하게 그 한 시간 동안은 회사 생각, 업무 생각이 안 나요. 진짜 신기할 정도로요.
제가 특히 좋아하는 스팟이 있는데, 숲길 중간에 있는 작은 다리 같은 구조물이 있거든요. 거기 난간에 기대서 멍하니 서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출근하는 사람, 데이트하는 커플, 혼자 책 읽는 사람. 다들 각자의 하루를 살고 있구나, 싶으면서 괜히 위안이 됩니다.
❄️ 겨울 — 집 근처 24시간 찜질방
겨울 위로 장소는 조금 특이합니다. 찜질방이거든요.
처음엔 저도 “찜질방이 무슨 힐링 스팟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겨울에 몸과 마음이 둘 다 얼어붙은 것 같을 때, 뜨끈한 바닥에 누워있는 것만큼 좋은 게 없더라고요.
제가 가는 곳은 집에서 버스로 15분 거리에 있는 동네 찜질방입니다. 프랜차이즈가 아니라 오래된 곳이에요. 시설이 최신은 아닌데, 그래서 오히려 편합니다. 어르신들 많고, 조용하고, 뭔가 정겨운 분위기가 있습니다.
특히 겨울 일요일 오후에 가면 최고입니다. 토요일에 밀린 집안일 다 끝내고, 일요일 오후에 느지막이 찜질방 가서 사우나하고, 식혜 마시고, 대자로 누워서 낮잠 자고. 그러다 저녁때쯤 나오면 월요일이 덜 무섭게 느껴집니다.
아, 그리고 여기 삶은 계란이 유독 맛있습니다. 정확히 왜 맛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다른 찜질방 계란이랑 확실히 달라요.
💫 이 장소들의 공통점
이렇게 쭉 나열해보니까 공통점이 보이더라고요.
- 유명한 곳이 아닙니다. 인스타 핫플도 아니고, 누가 추천해줘서 간 곳도 아닙니다.
-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계획해서 찾아간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알게 된 곳들입니다.
- 혼자 가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이게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혼자 있어도 눈치 안 보이는 곳이어야 진짜 쉴 수 있거든요.
- 돈이 거의 안 듭니다. 비싼 리조트나 호텔이 아니어도 충분히 위로받을 수 있다는 걸 이 장소들이 알려줬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억지로 힐링하려고 가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냥 계절이 바뀌면 자연스럽게 발길이 향합니다. 마치 몸이 기억하는 것처럼요.
😔 솔직히 아쉬웠던 점
물론 매번 완벽하진 않았습니다. 솔직하게 아쉬웠던 점도 말씀드릴게요.
을왕리의 경우, 차가 없으면 접근성이 정말 떨어집니다. 대중교통으로 가려면 환승을 여러 번 해야 하고,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퇴근 후에 가기엔 체력적으로 부담이 큽니다. 저도 차 있을 때만 가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올해는 아직 못 갔습니다.
경의선 숲길은 평일엔 괜찮은데, 주말엔 솔직히 추천 안 합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힐링은커녕 스트레스받을 수도 있거든요. 특히 가을 단풍 시즌 주말엔 정말 인산인해입니다. 반차 내기 어려운 분들은 이른 아침에 가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동네 찜질방은 시설이 좀 낡았습니다. 깔끔한 걸 좋아하시는 분들은 불편할 수 있습니다. 샤워실 타일이 오래됐고, 락커도 약간 삐걱거려요. 저는 그런 거 크게 신경 안 쓰는 편이라 괜찮은데, 민감하신 분들은 아닐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장소들이 저한테만 특별한 거지, 다른 분들에겐 아닐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위로 장소라는 게 결국 개인적인 기억과 감정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거잖아요. 제가 좋다고 해서 모두에게 좋을 순 없다는 걸 압니다.
❓ 자주 묻는 질문
Q. 위로 장소를 어떻게 찾으셨어요?
사실 “찾아야지”라고 마음먹고 찾은 적은 없습니다. 다 우연이었어요. 힘들 때 무작정 나갔다가 발견한 곳들입니다. 억지로 찾으려 하면 오히려 안 찾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냥 가끔 평소와 다른 길로 걸어보세요. 언젠가 “어, 여기 좋다”라는 곳이 나타날 거예요.
Q. 혼자 가시는 거 안 외로우세요?
처음엔 좀 어색했습니다. 근데 몇 번 하다 보니까 오히려 혼자가 더 편해지더라고요. 누구 눈치 볼 필요 없이 가고 싶을 때 가고, 나오고 싶을 때 나오면 되니까요. 그리고 위로 장소라는 게 결국 나 자신과 시간을 보내는 곳이라서, 혼자 가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Q. 남자분들도 이런 장소 있으신가요?
제 남편한테 물어봤더니, 본인은 동네 헬스장이 그런 곳이래요. 힘들 때 무작정 가서 러닝머신 뛰면 머리가 비워진다고. 사람마다 다른 것 같습니다. 꼭 조용한 곳이 아니어도 되고, 본인이 편한 곳이면 어디든 위로 장소가 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 마무리하며
글을 쓰다 보니 새삼 느낍니다. 저한테 이런 장소들이 있어서 다행이라고요.
직장생활 10년 넘게 하면서 번아웃도 여러 번 왔고,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았습니다. 근데 그럴 때마다 이 장소들이 저를 붙잡아줬던 것 같습니다. 거창한 여행이 아니어도, 비싼 호캉스가 아니어도, 계절마다 찾아가는 익숙한 장소에서 잠깐 숨 고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회복할 수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각자의 위로 장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없으시다면, 오늘 퇴근길에 평소와 다른 길로 한번 걸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어쩌면 그 길 어딘가에 당신만의 장소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계절은 또 바뀔 거고, 저는 또 그 장소들을 찾아갈 겁니다. 그게 제가 바쁜 일상 속에서 나를 지키는 방법이니까요. 여러분도 각자의 방법으로, 각자의 장소에서 위로받으시길 바랍니다. 🍃